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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이곳(울란바토르)에 있다는 조선 사람의 무덤을 찾아보았다.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뿐인 이 조선 사람의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였다. 그는 이태준이라는 청년 의사로 몽골서 보낸 5~6년간의 생활을 오로지 저열한 문화 수준과 불완전한 위생시설 탓으로 민중 사이에 만연한 갖가지 질병의 박멸에 바치고 마침내 이 이역의 흙에 그 짧은 일생의 최후를 마친 청년이었다.” (여운형, ‘나의 회상기’, 1936)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한 이태준(1883~1921)은 1907년 세브란스의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의학교 재학 중이던 1910년 2월, 안중근 의거 직후 통감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안창호가 건강 회복을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다. 이태준은 안창호의 권유로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구국운동을 시작했다.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 제2기로 졸업한 이태준은 모교 병원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이듬해 남경(南京)으로 망명해 기독회의원(基督會醫院)에서 의사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다.


1914년 이태준은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 고륜(庫倫: 울란바토르)으로 이주해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병원을 개업했다. 한국은 1885년 제중원 설립으로 근대의학이 도입된 지 이미 30년이 지났지만, 근대의학의 도입이 늦었던 몽골은 병에 걸리면 미신이나 낙후된 민간요법 외에는 뾰족한 치료법이 없었다.


몽골인은 유목 생활로 갖가지 질병에 감염돼 있었고, 특히 인구의 70~80%가 성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태준의 서양의술은 성병을 비롯한 질병 치료에 특효를 보였다. 그러자 그의 치료로 완쾌된 몽골인들은 그를 ‘신인(神人)’,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이라 불렀다. 그는 몽골 국왕 보그드칸의 어의(御醫)로도 활약했고, 몽골 왕족들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몽골 국왕은 인술로 다수의 몽골인을 구제한 그의 공적을 기려 1919년 이태준〈왼쪽 사진·몽골 화가가 그린 그의 초상화/동은의학박물관 제공〉에게 ‘귀중한 금강석’이란 뜻을 지닌 제3등 국가훈장을 수여했다. 이태준은 탁월한 의술로 몽골 사회에 기여하는 한편, 한국의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그의 병원은 독립운동가들의 숙박지와 연락거점으로 제공되었고,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 2000원을 지원하는 등 각종 항일운동단체에 거액의 자금을 제공했다. 1920년 한인사회당의 주도로 소비에트정부로부터 받은 40만루블의 자금을 울란바토르에서 북경까지 운송하는 데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북경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한 이태준은, 성능이 저급한 폭탄 때문에 항일운동에 어려움을 겪던 의열단에 우수한 폭탄 기술자를 소개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1921년 몽골로 돌아온 이태준은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고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러시아 백위파 부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몽골에서 그가 베푼 인술을 기리기 위해 2001년 몽골 정부가 제공한 울란바토르 시내의 2000여평 부지에 ‘이태준 기념공원’〈오른쪽 사진/동은의학박물관 제공〉이 조성되었고, 금년 6월 국가보훈처와 연세의료원 등의 노력으로 공원 내에 ‘이태준 기념관’이 개관했다.


[전봉관 KAIST 교수·한국문학]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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